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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한줄평 언론의 자유와 의무, 사명감을 아우르는 존엄한 드라마.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영화 포스터와 지나가다 접한 아주 단편적인 얘기 한두 개만 보고 갔다. 심지어 감독이 누군지도 몰랐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는 '메릴 스트립이 해내는 영화다' 정도면 충분했다.
이 영화는 메릴 스트립이 분한 캐서린 그레이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크레딧을 준다. '펜타곤 페이퍼'의 최초 보도는 뉴욕 타임즈에서 나왔고 이 문건을 터뜨리기 위해 3개월 동안이나 파고 들었던 기자와, 해당 문건을 유출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연구원과, 워싱턴 포스트에서 후속 보도를 밀어붙이기로 했던 편집국장이 있다. 몇년 전에만 나왔어도 이 영화는 그런 남성 출연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언론의 자유 및 국민의 알 권리를 수호하고자 했던 강하고 의지 넘치는 남성적 영웅 서사를 통해 이른바 '국뽕' 영화로 나왔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선을 약간 기울여 무대를 넓힌다.
워싱턴 포스트 지는 가족 경영 방식을 고수하는 지역 중소 일간지로써 자금난을 겪고 있고 주식 공개를 통해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다. 현재 포스트를 이끌고 있는 것은 남편의 사망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는, 밝고 사랑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꽤나 소심하기도 한 중년 부인 캐서린 그레이엄이다. 영화는 캐서린에게 초점을 맞추어 가족의 회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필사적으로 모색하는 한 여성이 고난에 직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모습들을 순차적으로 조명해 나간다.
단순한 영웅 영화로 만들어졌을 수 있는 이야기는 이 시점에서 성장 드라마로 도약한다. 공식 석상에서 너무 떨려 말 한 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다 자신의 발언을 그대로 다른 남자에게 뺏겨 버리던 캐서린은 영화의 막판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휘두르고 기죽이던 남자들 앞에서 회사와 가족의 명운을 걸어서라도 그들 가족이 지켜온 언론인으로서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위엄 있게 선언할 정도로 성장한다. 심리적 압박을 느낄 때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 안경도 똑바로 꺼내 쓰지 못할 정도로 소심했던 캐서린이 이사회 멤버의 말허리를 자르고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를 거역할 셈이라면 이사회를 나가라'고 선언하는 순간은 정말이지 카타르시스였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페미니즘을 읽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또한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국가가 지난 몇 대의 정권 동안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켜 가며 지속시켜 온 전쟁이 사실은 이길 가망 없는 무용한 소모전이라는 절망적인 결론이 주어졌을 때, 현 정권과의 전면전을 통해 회사와 각 개인의 파멸까지도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역사와 국민 앞에 침묵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언론인들의 서사는 극 내내 이어진 치열한 분위기 속에서 엄숙하고 숭고한 울림을 가진다.
언론 윤리에 대한 질문이 폭넓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 마치 맞춰서 내기라도 한 듯 이런 영화가 등장한 상황인데 개봉관의 현실이 암담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네임 밸류로 팔든, 주조연인 톰 행크스를 언론 자유의 화신으로 내세워서 팔든, 영화 내용으로 팔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로 팔든 이 영화가 한국에서 큰 호응을 얻을 가능성은 차고 넘쳤는데 배급사인 CJ의 게으름이 놀라울 지경이다.
긴장감을 놓지 않고 전개되는 시나리오와 시대 분위기를 멋지게 재현해 낸 의상, 묵직하게 울리는 OST에 배우들 각각의 섬세한 연기까지 정말 잘 만든 작품인데 한국 배급사가 이렇게까지 팔 생각을 안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안목도 센스도 없는데 잘만 장사하고 있다니 독과점이 이래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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