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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한줄평 현대 독자에게는 아기자기하고 가벼운 옛날 여행기. 이 여행의 사회적 파장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즐거움.


이 책은 페미니즘, 여성 인물의 삶, 그들의 저서 등이 대거 출판되고 있는 요즘의 추세에 발맞추어 출간된 르포이다. 이 책의 책갈피에 나와 있는 저자의 약력이 한국에서는 생소한 '넬리 블라이'라는 이름을 간단히 소개하기에 적합한 내용이라 옮겨 싣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약한 미국 기자. 본명은 엘리자베스 제인 코크런이고 1864년 5월 5일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판사였지만 넬리 블라이가 6세 때 사망했다. 이후 유복한 삶과 멀어져 교사가 되려는 꿈을 접어야 했다. 

20세에 지역 일간지에 실린 여성 혐오 칼럼을 읽고 보낸 반박문이 신문사 편집장의 눈에 띄어 기자로 채용된다. 23세에 뉴욕 시로 옮겨 환자 학대로 악명 높은 정신병원에 10일간 잠입 취재를 한 뒤 끔찍한 실태를 폭로했다. 이 특종 보도로 정신질환자 복지 예산이 대폭 증액되었고, 넬리 블라이는 퓰리처가 운영하는 <뉴욕 월드>의 정식 기자가 된다.

25세에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 영감을 얻어 세계 일주에 나섰고, 4만 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72일 만에 완주하는 대기록을 새운다. 여자 기자가 주로 패션이나 요리 같은 한정된 분야의 기사를 쓰던 시절에 이룬 성취여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녀의 이름을 딴 상품과 호텔 등이 생겨날 정도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자이자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

30세에는 사업가와 결혼하고 10년이 지난 뒤 남편이 죽자 직원 1500명에 달하는 철강 회사를 운영하면서 강철 배럴통을 개발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55세에 미국으로 귀국해 칼럼니스트로 활동했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대모 역할을 자처하며 입양을 주선하는 등 사회사업을 했다. 1922년 1월 마지막 칼럼을 쓰고 남은 재산은 고아들을 돌보는 데 쓰게 한 뒤 57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넬리 블라이는 체험을 기반으로 한 리포트를 통해 기자로서 빼어난 성과를 이루었으며, 여성 인권에 대한 선명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인권 신장 활동 면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물론 그의 인생 자체가 당대 여성 인권 신장에 혁혁한 기여를 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72일 동안 세계 일주 여행을 하면서 기록한 노트의 생생한 내용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여행지의 풍경과 문화, 또한 당시 교통수단의 상세한 묘사를 볼 수 있었던 것이 아기자기한 즐거움이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르포였음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름조차 생소한 지역들을 여행하며 풍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그가 겪은 우여곡절을 흥미진진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르포를 읽는 것은 모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즐거운 경험이었을 것이고, 이런 모험을 여자 혼자서 해냈다는 것 또한 크나큰 놀라움을 제공했을 것이다. 사실 현대에는 마음만 먹으면 그가 방문한 지역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직접 가볼 수도 있고, 심지어는 구글 스트리트뷰로 방 안에서 둘러보는 것도 가능한 시대이다 보니 여행기의 내용 자체는 충격적인 신선함을 제공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신 현대의 독자에게는 그의 르포를 읽으며 영감과 용기를 받았을 당대의 여성들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이 르포가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화적 배경이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수록 문화적 몰이해와 서구인의 시혜적 태도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동양에서의 경험이 이어지는 르포의 후반부는 그리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없었다. 이 르포가 1889년에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면죄부가 될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불편하게 느껴질 것 같다면 이 책을 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종차별, 동물권 등 현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가치들이 정립되기 한참 전의 사회적 배경 하에서 전개된 모험이라는 점만 이해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훌훌 읽을 수 있는 즐거운 여행기였다. 하지만 이 르포는 여성 혼자 해낸 세계 일주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묵직한 의의를 지닌다. 넬리 블라이는 여행 중에 만난 여성들과 본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여행기에서 그 점에 대해 몇 번이고 언급하고 있다. 당시 넬리 블라이가 방문한 상당수의 국가에서는 여성이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 사회적 금기에 가까운 파격이었던 만큼, 여성에게 주어진 족쇄와 그를 당연시하는 사회적 룰을 박살내고 밖으로 뛰쳐나간 넬리 블라이의 행위 그 자체가 여행기의 내용 이상으로 큰 즐거움과 영감을 선사한다. 시대를 앞서 나간 선구적 여성들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이 책을 펼쳐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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