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공연/발레] 유니버설 발레단 스페셜 갈라

Cab 2018. 3. 4. 01:22

점수 ★★★☆

한줄평 풍성하고 화려한 공연, 당대성이 부족한 젠더 감수성.


올해 문화생활을 열심히 해 보고자 상반기에만 다섯 편의 공연을 예매해 놓은 상태인데 가장 첫 번째가 유니버설 갈라. 한다길래 예매만 해놓고 어떤 작품들이 올라오는지는 아무 정보도 없이 가 보았다.


60여분씩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품 구성에 의한 전체적인 흐름이 좋았고 클래식, 컨템포러리, 창작발레 등 레퍼토리도 다양해서 볼거리가 풍부한 공연이었다. 오프닝이었던 <말라게냐>는 무용수들이 붉은 배경 속에 검은 실루엣으로 등장한 상태에서 시작되는데, 조명이 바뀌면서 배경의 붉은색이 무용수들의 새빨간 플라멩코 의상으로 수렴하면서 공연에 삽시간에 몰입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경쾌한 오프닝 스테이지 후 <백조의 호수> 2막의 유명한 흑조 파드되가 이어지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데, 이 씬의 명장면으로는 다들 오딜의 32회전을 꼽지만 나는 그 뒤에 오딜이 피케 턴으로 무대를 휩쓸고 왕자와 만나 피날레를 연출하는 장면을 더 좋아한다. 푸에테를 장면은 32회전을 해내는 기교에 집중된 씬이라 분위기가 달아오르긴 해도 혹시나 실수하지는 않을까 하는 긴장이 있어 텐션을 놓을 수 없는 반면, 이 씬을 무사히 끝내고 나면 음악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그에 맞춰 오딜의 자신감 가득한 캐릭터가 한껏 발산되는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다. 내가 다 신나서 들썩들썩할 정도로 좋아하는 장면.

관객 반응도 좋았고 홍향기, 이동탁 듀오도 실수 없이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 파드되를 시작으로 32회전 그랑 푸에테가 포함된 레퍼토리가 세 개나 되는 건 아무리 갈라쇼라도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싶었음. 관객 호응이 워낙 좋은 장면이긴 하지만 각 작품에서라면 비장의 무기 같은 씬인데 굳이 한 공연에 세 번이나 넣어 기술의 격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무대는 유니버설의 창작 레퍼토리인 <춘향>의 초야 파드되인데, 말 그대로 몽룡과 춘향의 첫날밤 씬이다. 이 작품을 일부라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초야를 치르는 두 사람의 상황을 꽤 노골적으로 연출하고 들어가서 과감하다고 느꼈지만 안무의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두 사람이 첫날밤을 치르기 위해 옷을 한 꺼풀씩 벗어 나가는데 이것이 무용의 안무로써 기능하기보다는 옷 벗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관객은 자연스럽게 관음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어 다소 불편했다. 

첫 정사의 떨림과 기대, 고조되는 흥분과 희열 등 각 상황과 감정에 대한 표현은 좋았으나 춘향의 캐릭터는 시종일관 수줍게 끌려가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고전을 해석하는 데 현대적인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춘향의 캐릭터에 대한 재해석 없이 이 레퍼토리가 언제까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회의적이다. 

작품 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만 강미선, 이현준 듀오의 연기는 굉장히 좋았고, 기술 면에서도 난이도 높은 리프트 동작이 연달아 이어지는 안무를 잘 소화해 내어 실수 없이 좋은 무대를 보여 주었다.


그 다음 무대인 <발레 101>은 재치 있고 재미있게 꾸며진 작품이라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무용수 한 명이 등장하고 배경음악은 '목소리'이다. 발레의 각 포지션에 번호를 매겨 하나씩 소개한 다음 목소리가 번호를 조합해 무용수에게 지시함으로써 안무를 만들어 나가는 일련의 흐름이 흥미로웠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안무를 감상할 수 있으면서 중간중간 곁들여진 위트도 직관적이라 즐겁게 감상했다. 

아쉽게도 이 작품에도 큰 단점이 하나 있다. 작품의 핵심인 '목소리'는 완성된 배경음악으로써 재생되다 보니 영어로 말하게 되는데, 번호를 말하는 부분은 그래도 괜찮지만 '대사'를 하는 부분에 대한 번역이 어떤 형태로도 제공되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 대사도 극의 일부이고 대사에 담긴 의미가 정보값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영어로만 나오다 보니 작품을 직관적으로 온전히 즐길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서 한 번 번역을 거쳐야 이해하고 웃을 수 있으니 자연히 박자가 조금은 늦는데, 아예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이라면 사실상 반쪽짜리 공연을 본 셈이다. 번안하기가 힘들었다면 오페라처럼 스크린을 달아 자막을 띄워주는 정도의 성의는 있어야 했다고 본다.


<지젤> 2막의 파드되는 점프가 이어지는 지젤의 안무가 체력적으로 하드코어하다 보니 가끔 너무 생명력 넘치는 연기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윌리의 하늘하늘한 느낌을 잘 살린 최지원 발레리나의 연기가 좋았다.


<해적> 3인무에서는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발레리노가 기술적으로 워낙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고 관객 반응도 열광적이었던지라 다른 두 분도 좋은 연기를 했지만 다소 묻힌 감이 있다. 이 작품에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는 무대광풍이었음.


2막은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무대에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할 말이 별로 없지만 <멀티플리시티>의 첼로 2인무가 2018년 한국에서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은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바흐가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첼로를 여성 무용수로 등장시켜 음악가와 악기의 상호작용을 안무로 표현한 것인데, 발상이 좋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는 악기다'라는 식의 성적인 농담을 무대에 그대로 올려놓은 듯 섹슈얼한 느낌을 주는 격정적인 안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여성은 현대에도 여전히 심하게 대상화되고 물건처럼 소비된다. 그런데 아예 바흐의 테크니컬한 활질에 몸을 떨며 울리는 악기를 사람으로 해석해 버린 작품을 지금 시점에 봤을 때 그게 '좋은 은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내가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몰랐거나 여성이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면 이 작품은 훌륭하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작품에 '옛날에는 허용됐겠지만 지금은 안 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라면 가능해질수도 있는' 작품이라는 딱지를 붙여 주겠다.


유니버설 갈라는 전반적으로 두 시간 동안 알차게 채워진 즐거운 무대였다. 다채로운 안무와 연출을 통해 지루하지 않게 짜임새 있는 공연을 만들어 냈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임으로써 유니버설 발레단의 수준을 훌륭히 증명했다. 하지만 당대성에 대한 예민함이 부족한 작품이나 장면들이 심심찮게 눈에 걸려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한다. 관객의 의식은 빠르게 진보하고 발레 레퍼토리들의 시대착오적인 면에 대해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컴퍼니도 날을 세우고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뒤처지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다. 기술만으로는 관객을 영원히 발레에 잡아둘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