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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비뚤어진 집 (Crooked House)

Cab 2018. 2. 28. 00:30

점수 ★★★

한줄평 현대인에게는 새롭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책을 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소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전집을 틈날 때마다 한 권씩 사와서 읽는 중인데 70권이 넘는 작품을 모두 섭렵하려면 갈길이 아주 멀고 이미 읽은 10여권의 작품들에 대해 감상을 쓰는 것도 꽤나 지난한 작업이 될 것 같다. 일단은 가장 최근에 읽은 두 권 중 한 권에 대해서 써 보기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추리소설로써도 실로 뛰어난 작품이지만 가문, 혹은 마을 단위의 무대에 서로 얼키고 설킨 인물들을 하나씩 배치한 뒤 그들이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벌어지는 드라마를 풀어내는 데서 더욱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작가 본인도 작품을 쓸 때 이 점에 각별히 공을 들인 듯한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이 작품의 경우 그 중에서도 작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 중 하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특별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기발한 트릭이나 빼어난 탐정이 나오는 정통 추리소설이 아니다. 사건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나레이터로써 주인공이 배치되어 있지만 그는 추리나 수사 면에서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말하자면 포와로 시리즈의 헤이스팅스 정도 역할이다. 사건은 예정된 대로 흘러가고 그 흐름은 끝까지 바뀌지 않는다. 주인공이 하는 것은 이 사건의 무대에 올려진 용의자들을 하나씩 인터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그들의 정보를 전달하고 추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추리 부분이 독자의 역할로 넘어왔지만 그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힌트는 초반부터 꽤나 노골적인 형태로 전달되고 반복해서 강조된다. 재산 다툼이라는 가장 그럴듯한 동기 하에 인물들의 행동을 조명하지만 '진상은 그것과는 다름'이라는 정보를 끊임없이 암시하니 모를 수가 없다. 현실 범죄의 경우 가장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범인이지만 추리 소설은 '가장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범인'이라는 전제가 있고 소설의 중후반부는 인물들의 드라마를 보여주면서 독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독자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전개가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추리소설의 문법 하에서 굉장히 쉽고 친절한 작품이네'라는 것이 나의 감상이었지만, 이 소설이 나왔을 당시의 분위기는 좀 달랐을 것이다. 이 작품 이전에 쓰인 추리소설을 꽤 많이 읽어 보았지만 이런 범인이 제시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었고, 동기 면에서도 당대에는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충격으로 가득한 결말이었을 법 하다.


작품의 결말이 주는 파격이 현대에 와서는 다소 약하게 받아들여지는 면이 없지 않으나 그럼에도 이 작품의 가치가 퇴색되지 않는 것은 스토리를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가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글맛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 각각에게 풍부한 인격이 부여되고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현대인의 시선에서도 충분히 현실적이어서 익숙할지언정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게다가 독자에게는 범인을 초반에 추리해 냈든 못 했든 이 책을 결코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주인공 커플이 결혼에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소설을 끝까지 읽어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올가미가 여간 잔망스럽지 않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