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발레] 지젤 2018, 국립발레단 (Giselle)
점수 ★★★★
한줄평 발목 잡는 스토리만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안정적인 공연.
내게 있어 지젤은 정말로 딜레마가 큰 작품이다. 스토리만 빼면 모든 것이 좋은데 그 스토리가 도저히 감안하고 넘어가 주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기 때문이다.
약혼자가 있는 귀족이 신분을 속이고 병약한 시골 처녀를 꼬셔 결혼까지 약속하는데 우연한 기회로 거짓말이 들통나는 바람에 상심한 시골 처녀는 충격으로 죽는다. 그런 식으로 연인에게 배신당해 죽은 처녀귀신들이 모여 남자들을 혼내주고 있노라니 지젤을 죽게 만든 귀족 남자가 찾아와 이놈도 죽이자 하고 있을 때 바로 그 때문에 죽은 지젤이 구구절절한 사랑의 춤을 추며 남자를 살려달라 애원하고 실제로 남자는 목숨을 건지지만 이 불쌍한 처녀는 아침이 오자 무덤으로 돌아간다.
사랑의 위대함이라고 포장해 줄 거면 여자도 살아나든가, 정의를 구현할 거라면 남자가 약혼녀에게 파혼당하고 집안에서 쫓겨나 행려병자로 살다 죽든 강물에 몸이라도 던지든 했어야 했다. 남자가 잘못을 했다 해도 무한히 넓은 마음씨로 감싸 주고 죽어서도 지고지순하게 자기를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남성 판타지의 결정체 같은 작품을 좋다고 보고 있는 자신에게 일단 자괴감을 적립하고 들어가야 하는 우스운 상황이다. 비난하라면 하루 온종일도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가 싫다. 그런데 또 더 열받는 게 작품을 너무 잘 만들어 놔서 명작 소리를 들으며 자꾸 무대에 올라온단 말이다.
3월 말에 국립발레단에서 지젤을 올렸는데 4월 초, 유니버설 발레단에서도 지젤을 올렸다. 시기를 겹쳐 올려도 흥행이 될 거라 판단할 정도로 관객동원력이 좋고 인기 많은 작품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욕은 했지만 갔다 왔고.
3월 23일 공연을 관람했고 캐스팅은 지젤 김리회, 알브레히트 허서명, 미르타 정은영이었다.
김리회 발레리나의 지젤이 정말 훌륭했다. 지젤은 나이가 어리고 춤을 좋아해 밝고 발랄하지만 심장이 약해 원하는 만큼 자유롭고 힘차게 뛰지 못한 채 조금만 힘들어도 비틀거리며 어딘가 위태로운 이미지를 풍기는 양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특성을 드러내는 안무 부분 이외의 움직임에서도 그 오묘한 캐릭터성이 굉장히 잘 살아 있어 굉장히 지젤다운 지젤이라는 감상이었다. 김리회 발레리나의 춤이 지젤의 속성과 아주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다. 가볍고 청순하면서 약간 차분하기도 하고, 조금은 소심한 느낌을 주는 지젤이었다.
알브레히트의 정체와 약혼녀의 존재를 알고 광란의 춤을 추다 쓰러져 죽는 장면에서 기존에 보던 지젤들에 비해서는 약간 폭발력이 약하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1막에서 보여준 캐릭터성에 비추어 보면 이 지젤이 폭발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납득이 된다.
광란의 춤 장면에서 보여준 지젤의 감정선은 배신감보다는 충격 쪽에 많이 치우쳐져 있는데, 초반 보여준 캐릭터성과도 맞고 알브레히트에 대한 사랑으로 망설임 없이 그를 용서하며 그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2막의 연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캐릭터 빌딩을 보여 주었다.
1막에서 춤과 연기가 워낙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2막도 기대를 많이 했고 기대에 걸맞는 무대를 볼 수 있었다. 1막에서보다도 가볍고 처연해진 움직임의 표현이 굉장히 좋았고 연기도 완성도 높았다. 바로 전날 댄싱 발레리노에서 박선미 발레리나의 지젤 파드되를 보고 대만족했던 터라 비교가 안될 수 없었는데 그 이상으로 좋았다. 슬픔과 사랑의 감정을 격정적인 어필 없이도 풍부하게 전달했고 난이도 높은 안무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춤이 워낙 안정적이라 실수에 대한 걱정 없이 내용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편안함이 돋보였다.
알브레히트 역 허서명 발레리노의 경우 1막에서는 그리 존재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2막 후반을 위해 체력을 아끼느라 그랬는가보다 하고 납득이 갈 만한 임팩트를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점프력이 굉장히 좋고 점프와 턴의 연결동작들도 안정감 있었다.
미르타 역 정은영 발레리나도 좋은 연기를 선사해 주었는데, 2막의 등장 장면에서 스텝이 워낙 좋아 정말로 안개 위를 떠 가는 듯 흔들리지 않는 움직임을 보여준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주 튀는 배역은 아니지만 우아하고 단호하게 윌리들을 통솔하고 알브레히트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카리스마가 좋았다.
군무는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딱히 크게 흠 잡을 부분도 없는 무난한 모습이었다.
1막의 약혼자 등장 장면에서 커다란 아프간 하운드 두 마리가 무대에 등장한 것은 분위기를 환기하는 효과는 확실했지만 아무래도 강아지들의 스트레스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마리 모두 사고 없이 얌전하게 무대를 마치고 들어갔으니 간식 많이 얻어먹고 푹 쉬었길 바란다.
작품 자체에 대한 아쉬움을 제외하면 매우 좋은 공연이었다. 이미 수 차례 올라왔던 프로덕션인 만큼 의상이나 연출, 음악 등의 요소들에 빠지는 곳도 없었고 관람한 회차 배우들의 합도 좋았다. 실력 면에서도 굉장히 안정적이라 아무 걱정 없이 무대를 즐길 수 있었다. 마임의 비중이 제법 높은 작품이라 마임으로 스토리의 디테일을 따라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젤은 워낙 오랜 시간에 걸쳐 인기를 누려 온 작품이라 작품 자체의 구시대적 면모에도 불구하고 당분간은 심심찮게 무대에 불려 올라올 것 같다. 비판적 감상을 가진 관객의 수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태될지, 리프로덕션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징성에 따라 변화 없이 계속 상연될지도 지켜볼 일이다.